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애치슨 라인 (문단 편집) == 영향 == '''애치슨 선언 이전까지 김일성의 전쟁요구는 스탈린에게 계속 거절당했었고, 애치슨 선언 이후에 김일성이 다시 스탈린을 찾아가서 전쟁을 승인받았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처음으로 한국전쟁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었다. 스탈린은 애치슨 선언 이후인, 1950년 1월 30일 처음으로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를 표했고, 1950년 3월과 4월에 있었던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미국의 참전 여부와 마오쩌둥의 참전 여부 등을 검토한 후에 최종적으로 전쟁을 승인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드디어 김일성에게 “나는 김일성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남한과 관련해 김일성이 도모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므로 철저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라고 알려왔다. 스탈린은 여전히 남한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소련을 위험하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기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 문제는 잘 계획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 >김일성과 북한 외무장관 박헌영은 3월 하순 소련 군사고문들과 공격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아시아 본토에서 군사개입을 배제한다는 새로운 극동정책을 채택했다는 정보국의 보고를 주된 근거로 승인을 해주었다.''' 이런 정확한 정보에 근거해서 소련의 지도자는,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 해도 미국이 남한을 위하여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의 변화”가 이제는 무력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의 변화는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중국 군대가 필요한 경우 한반도에 참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막지 못한 미국이 훨씬 득이 적은 한국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또 다른 “국제정세의 변화”는 전 달에 체결된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방위동맹으로 인해 미국이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도전에 좀 더 소극적이게” 만들었다고 스탈린은 생각했다. >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스탈린은 “미국에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이며 현재 전반적인 분위기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스탈린의 발언은 1949년 12월 말경 채택한 NSC 48이라 불리는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정책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련이 워싱턴에 심어놓은 고위급 영국인 스파이 도널드 매클린(Donald McLean)을 통해 그 정책을 숙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1월 12일 국무부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의 연설을 통해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이 발언은 NSC 48의 내용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의 군대해산으로 인해 가동할 수 있는 군대동원 능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일본과 아시아 본토, 그리고 필리핀과 아시아 본토 사이의 동쪽으로 한정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방위선(defensive perimeter)”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켜버렸다.''' > >스탈린은 워싱턴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정책이 그 지역에 힘의 공백을 만들었다고 보았고, 그 공백을 매우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1950년 1월 첫 주에 스탈린은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정책을 전부 바꿨다. 1월 6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연락해 동맹을 맺자고 제의했다. 마오쩌둥이 지난 12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이 동맹에 대해 주저했었다. 이러한 메시지는 1월 12일 국무부장관 딘 애치슨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기 이전에 마오쩌둥에게 전달됐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봤을 때 스탈린이 1월 6일 이전에 매클린으로부터 NSC 48의 실체에 관해 들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처음으로 남한에 대한 침공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고 미국이 개입 안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남침이 허용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스탈린의 염려는 결과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미국의 의지가 약화됐고, 중국이 필요시에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미국에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의 소극적 태도 전환을 간파했고, '''이러한 확신은 애치슨 라인의 천명으로 더 강해졌다.''' 그래서 한반도에서의 군사도발이 신속하게 진행되고, 미국이 즉각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하에 스탈린은 전쟁을 승인했다. >---- >북‐중‐소 삼각관계가 6ㆍ25전쟁 과정과 전후 북한외교 행태에 미친 영향 :기밀해제문서를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2010, vol.33, no.3, 통권 120호 pp. 117-142 (26 pages)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79801|#]] 박명림의 저서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근거로 당시에 발행된 《[[로동신문]]》 1월 15일자에서 북한은 애치슨 라인에 한국과 대만, 일본, 필리핀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북한 노동신문이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 한국이 포함된다고 인식한 것은 오보로 인한 착각이었다. 이후 로동신문 2월 10일자에서는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제외되어 있다고 제대로 보도한다. 또한 김일성이 애치슨 선언을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다고 이해하고 흥분했다는 증언이 있다. >3) 남과 북의 반응 >1950년 1월 6일자 대한민국 국무회의의 내용을 통해서 드러난 바와 같이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당시 대한민국의 우려 섞인 주도적인 관측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1950년 1월 25일자 로동신문 에서 애치슨라인에 남한이 포함된다고 적고 있다.이것은 뉴욕타임즈 의 오보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1월 12일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면서 연설문 사본을 배포하지 않았으며 기자들은 자신들의 메모에 의존해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에 정확히 쓸 수 없었다. 뉴욕타임즈 1월 13일자에는 한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1월 15일자에는 점령하의 일본, 한국, 오키나와, 필리핀이 방위선에 포함된다고 명시했으며 자국민들의 직접적 책임 하에 있는 지역은 동남아시아라고 적었다. '''이는 명백히 오보였다.''' 이에 장면 대사는 애치슨에서의 연설에 대한 이승만의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북한은 로동신문 2월 10일자를 통해 “미국은 일본, 필리핀, 그리고 琉球열도를 통제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 남한이 방위선 바깥에 위치하고 있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애치슨방위선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로동신문 1950년 3월 3일자와 10일자에는 “애치슨 연설은 거짓말과 선동으로 가득 차 있어 아시아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전쟁을 준비한 의도를 숨기는 시끄러운 합창”이라고 비난해 일견 미국의 개입을 예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나 이는 북한 특유의 반미적 태도를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때 김일성의 ‘직속기자’ 였던 한재덕에 의하면 북한의 중앙통신사가 미국 뉴스통신사의 전문들을 정기적으로 녹음했는데 애치슨연설도 유선통신문으로 채록되어 자신이 직접 김일성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지도자들이 크게 흥분했다는 증언인데 아마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것에 고무되었다는 맥락으로 추측된다.''' >----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내전설과 남침유도설에 대한 비판적 조망, 이완범,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2006, vol., no.62, pp. 377-397 (21 pages)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042105|#]] 다만, 사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으면서도 전쟁을 승인했고,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하길 희망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름하여 [[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이다. 조지워싱턴 대학 교수인 리처드 쏜턴에 의하면, 미국은 NSC-68을 위해서, 애치슨 라인으로 김일성의 오판을 촉발해서 남침을 유도했고, 스탈린은 이런 미국의 남침 유도를 간파하고 오히려 역이용하기로 했다. 미군을 동아시아 한반도 지역의 장기 소모전에 묶어놓고, 소련은 유럽의 공산주의 확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전쟁 승인의 조건으로 김일성에게 마오쩌둥의 참전 약속을 받을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잠재적 경쟁자인 중국을 미국과 [[이이제이]] 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